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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불이 꺼지고 놀란의 이름이 스크린에 뜨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아, 이번엔 또 어떤 방식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하는구나"라는 기대 반, 긴장 반의 감각. 다른 감독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놀란은 이야기를 설계한다. 그것도 아주 짓궂게.

시계공의 손

놀란의 영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이 사람은 시나리오를 쓴 게 아니라 시계를 조립한 게 아닐까. 톱니바퀴 하나하나가 어긋나면 전체가 멈춰버리는, 그런 정교함. 〈메멘토〉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았을 때, 사람들은 "실험적이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게 실험이라기보다는 고백처럼 느껴졌다.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서사조차 편집된 것일 수 있다는 것. 놀란은 그 불안을 관객에게 그대로 옮겨 심는다.

그리고 그는 절대 친절하지 않다. 설명해주지 않는다.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그 오만함이 이상하게도 매력적이다. 요즘 영화들이 관객을 너무 배려한 나머지 모든 걸 대사로 풀어버릴 때, 놀란은 여전히 우리의 지능을 믿어준다는 느낌을 준다. 존중받는 기분이랄까.

스펙터클 속에 숨긴 마음

사람들은 놀란을 "차갑다"라고 말한다. 두뇌 게임의 대가, 감정보다 구조를 우선시하는 감독. 그런데 나는 그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터스텔라〉의 쿠퍼가 딸에게 보내는 영상 메시지를 보다가, 우주의 시간 지연 이론이 눈물로 바뀌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물리학 공식이 순식간에 부성애로 번역되는 그 순간, 놀란은 자신이 감정을 다룰 줄 모르는 게 아니라 감정을 아껴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했다.

그는 눈물을 남발하지 않는다. 대신 거대한 서사의 무게 전체를 한 사람의 얼굴 위에 떨어뜨린다. 그래서 그 한 방이 더 아프다. 〈오펜하이머〉에서 킬리언 머피의 눈빛이 폭발 장면보다 더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것도 같은 이유다. 놀란에게 진짜 폭발은 스크린 밖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아날로그를 향한 고집

CG가 넘쳐나는 시대에 그는 여전히 진짜 비행기를 뒤집고, 진짜 세트를 회전시키고, 진짜 필름으로 촬영한다. 이 고집을 보고 있으면 어떤 장인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효율을 포기하고 진짜를 택하는 사람. 물론 이게 허세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결과물을 보면 납득할 수밖에 없다. 〈덩케르크〉의 해변에 서 있으면, 그게 CG였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을 무게가 가슴을 짓누른다. 그는 관객을 속이는 대신, 관객이 진짜로 그 자리에 있다고 믿게 만든다.

실패해도 매혹적인

솔직히 말하면 놀란의 모든 작품이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영화는 너무 많은 걸 설명하려다 스스로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여성 캐릭터들이 서사의 부속품처럼 소비된다는 비판도 타당하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관을 나설 때마다 드는 감정은 한결같다. "방금 뭔가 큰 것을 목격했다." 완벽함보다 야심이, 안전함보다 위험한 도박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걸 그는 아는 사람이다.

왜 우리는 계속 그를 기다리는가?

놀란의 신작 소식이 뜰 때마다 극장가 전체가 술렁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 남자는 여전히 영화가 '사건'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몇 안 되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스트리밍 버튼 하나로 모든 걸 소비하는 시대에, 그는 굳이 큰 스크린 앞에 줄을 서게 만든다. 시간을 뒤틀고, 꿈속에 꿈을 쌓고, 원자폭탄의 서사를 인간의 죄책감으로 압축하는 이 남자는, 결국 관객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관에 앉아 있는 이 두 시간만큼은, 네 시간 감각을 나에게 맡겨줘."

그리고 우리는, 매번 순순히 그 제안에 응한다. 나는 또다시 그를 기다려본다.